사랑하며 감사해요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이종경 할머니 이야기

지은이 이종경
펴낸이 이대범, 김웅
펴낸곳 REPETO AI 레페토 에이아이
주소 서울시 강남구 선릉로 94길 12, 6층
홈페이지 http://mominterview.com
전화문의 010-3111-3420
1941년 6월 12일
“손자들아, 할머니가 태어난 곳은 궁정동 10번지, 지금의 청와대 옆이란다. 1941년 6월 12일에 이 세상에 왔어. 그 당시에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에서 태어났지. 할머니도 그렇게 집에서 태어났단다.할머니에게는 형제들이 있었어. 내 밑으로 남자 동생이 셋, 그리고 그 밑에 여자 동생이 둘, 총 여섯 남매였지. 우리 형제들 사이에는 각각 5살씩 차이가 났어. 그 당시에는 가족이 많은 건 흔한 일이었단다."
고무줄과 공기놀이
"어렸을 때 살던 곳이 청운양로원이었어. 산속에 있는 그런 곳이었는데, 매일 학교 가는 길에는 언덕을 오르내리며 다니고 있었지. 어느 날 학교 늦게 갔다가 뛰다가 넘어져서 무릎 다쳤던 기억이 생생해. 학교 다닐 때 가끔 시장에 가는 심부름을 했는데, 잘 해오면 칭찬도 받았어”
" 어릴 때는 장난감을 많이 살 수 있는 때가 아니었어. 그래서 고무줄이나 공기 돌 등으로 놀았지. 고무줄을 이렇게 두 친구가 갖고 있으면 그 위에를 펄쩍펄쩍 뛰면서 고무줄 하는 거 하고 그다음에 공기 돌 5개를 가지고 공기하는 거. 그 두 가지가 제일 많이 하는 놀이였지. 그리고 저기 분필로 이렇게 뭐야 직사각형을 그리고 거기서 펄쩍펄쩍 뛰는 거."
호두와 홍시, 새우젓과 열무김치
"그리고, 호두를 따거나 나무에 매달려 미끄럼틀을 타고 놀았던 기억이 있어. 집 주변에 호두나무가 있어서 특별했고, 자연 속에서 놀던 기억이 많아. 이후에는 평창동으로 이사 갔는데, 거기는 정원에 감나무가 있어서 홍시를 떨어뜨리곤 했어. 외할머니가 '홍시가 달린 집으로 시집을 보내야겠다'고 하셨는데. 은평교회 시 문학관에서 시를 지으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내가 처음 진 시가 '홍시'였어.”
“어릴 때 좋아했던 음식은 열무김치와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무청을 넣은 새우젓. 정말 맛있었지. 생선도 좋아했는데, 꽁치를 구워서 먹는 걸 좋아했어. 싫어했던 음식은 별로 없었어. 먹을 것이 없었으니까.”
6.25전쟁
"하지만, 할머니가 11살 때 초등학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6.25 전쟁이 터졌어. 그래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어. 초등학교를 부산에서 다녔지. 피난 가던 중에는 너무도 먹을 것이 없었어. 항상 배가 고팠지. 그 때 꽁보리밥을 먹었던 기억이나. 그런데, 그렇게 배가 고팠는데도 너무나 맛이 없었던 기억이나.”
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약학과를 나오셨기 때문에 약사로 일하셨어.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직업을 가지신 적이 없으셨어. 어머니는 일생을 가정주부로 지내셨지. 할머니의 학교 이야기도 궁금하겠지? 우리 외할아버지는 경성대학교 약학대학을 나오셨고, 우리 외할머니는 배화여고를 졸업하셨어.
이런 이야기들, 우리 가족의 과거 이야기가 너희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길 바래.”
진명여자중고등학교와 이화여대
“할머니가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해줄게. 할머니는 청운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피난 가서 천막을 치고 가르쳤던 성지 국민학교에서 배웠어. 그곳에서 6학년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진명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단다. 그리고 나서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어. 진명에서 함께 입학한 친구들 5명이 모두 떨어지지 않고 함께 붙었지만, 이화대에는 경기여고에서 온 친구들이 20~30명씩 들어와서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어.
YWCA를 찾아가다
"대학 졸업한 다음에는 어느 교수님이 YWCA에서 사람을 구하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와이를 찾아가라고 했어. 나는 중학교 때부터 예수님을 믿게 돼서 교회를 열심히 다녔어. 그래서 졸업하면 봉사하는 기독교 기관에 가서 봉사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어. 그래서 YWCA를 혼자 찾아갔지. 그래서 간단한 테스트를 보고 나서 그날 저녁에 전화가 왔어. 내일부터 YWCA에 근무하라고 해서 YWCA 그 인연을 갖게 됐어. 그래서 32년 동안 근무를 했어. YWCA를 나온 다음에는 청소년회관 관장으로 5년간 근무를 했고, 그 다음에는 여성인력개발센터 관장으로 2년을 일했어. 그게 할머니의 거의 40년간의 직장 생활이었지.”
1971년의 결혼, 딸과 아들
"결혼은 1971년도에 했어. 그 때 딸 소희를 낳고 72년도에는 아들 대범이를 낳았지. 연년생으로 낳고선 남매를 키웠는데, 시어머니하고 같이 사시면서 두 아이를 봐주셨어. 손수 봐주실 연세가 아니셨어. 결혼할 때부터 우리와 같이 살면서 가사를 도와주던 가사도우미가 있었어."
“친했던 친구들은 부산 피난통 시절 친구들도 있고. 하지만 서울로 오면서 헤어졌고, 그 후에는 진명중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내곤 했어. 친한 친구 여럿이 이화여대를 갔어. 몇 년 전에는 미국에서 살던 두 친구가 서울에 나와서 만나기도 했지. 아직도 그들과 연락을 하고 있어. 한 명은 자주 연락도 오고 카톡도 주고 받는데, 한 명은 잘 오지 않아서 아쉬워.”
어릴 때의 꿈
“어릴 때 꿈꿔왔던 직업은 봉사하면서 기독교적인 기관에서 일하는 것이었어. 그래서 YWCA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일을 통해 많은 경험과 훈련을 받았어.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YWCA에서 32년간 일했고,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았어."
대학생부 간사
"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서 하와이로 이민 가신 박에스더 선생님이 세계 와이를 통해서 한국의 협동 총무로 나와 계셨어. YWCA에 들어갈 때 박에스더 선생님의 비서로 맨 처음에 들어갔어. 그때 박에스더 선생님이 외국에서 사회 사업에 대한 공부를 하시고 YWCA에 대한 아주 행정 능력과 리더십이 숙련되신 분이라 YWCA를 매우 앞서가는 그런 단체로 만드셨기 때문에 내가 그 밑에서 일을 하는데 너무 좋은 공부를 한 거지. 그래서 처음에 들어가서 일을 할 때 너무 신나게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어."
직장에서의 성장
"YWCA에서 성장의 기회를 갖게 돼서 너무 좋았는데 나중에는 이제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인사위원장이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비서 일은 그만두고 프로그램 쪽으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인사위원장이 대학생부 간사 일을 하라고 했어. 매주 학생들 데리고 캠프 다니고 세미나 하고 주말에도 계속 활동하느라고, 쉴 새가 없었어. 그 때는 즐겁기도 했지만 결혼 후에 소희, 대범이랑 시간을 보낼 시간도 없이 대학생부 간사일 하느라고 주말도 없었던 게 좀 힘들었어."
한 달에 하루만 잘 지내면
"보상을 너무 적게 받아가지고 생활이 풍족하지 못했는데, 지방회의 간사들은 연합회 간사보다 더 박봉이였어. 그래 가지고 내가 이제 위로해 주느라고 YWCA에 일을 하면 다른 건 다 신나는데 한 달에 한 번씩만 기분 나쁘다. 월급 탈 때만 기분 나쁘다. 그러니까 한 달에 한 번씩 기분 나쁜 날만 잘 지나면 나처럼 이렇게 몇십 년을 YWCA에서 일할 수 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고 약속했다고 그러면서 내가 잘 버티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지."
이종경 쌤 카톡방
"그랬더니 그거를 기억하는 지방 간사들이 있더라고. 그래서 얼마 전에도 나한테 그 지방의 실무자 대여섯명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 근데 지금은 그 사람들이 어디 가서 일하냐면 우간다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 친구가 하나 있고 또 몽고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 실무자가 하나 있고 또 인천 와이에서 간사했던 사람 부산와이에서 나중에 사무총장까지 했던 사람도 있었어. 그리고 5명이 정자역 정자동에 만나러 왔어. 그래서 만났는데 1년에 한 번씩이라도 만나자고 그래서 지금 이종경 쌤 모임이라고 해가지고 카톡을 개설했어."
가족
"제일 마음 아팠던 건 소희가 미술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을 때였어. 집안 사정상 미술을 할 수 없다고 해서 한문교육과를 가게 했거든. 좀 더 지지해줬다면 우리 소희가 원하는 미술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대범이와 소희
국제친선부
"YWCA에 국제친선부가 있었어. 굉장히 오랫동안 내가 담당 했었는데 영어를 하긴 해도 아주 완벽하게 유창하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잖아. 내가 영문과에 들어가니까 이화여고하고 경기여고 학생들은 특출하더라고. 나는 영어를 뻑뻑 대면서 했지. 그렇게 아주 유창하지를 못하니까 그게 답답했어."
기독교 윤리학과 대학원
"그래도 당시에 남이 못하는 외국 여행을 많이 다녔어. 여행에 대한 갈증은 많이 풀렸고, 대학 교수님들 같은 발란티어들이 YWCA에 많이 계시니까 나도 계속해서 대학원이나 박사 과정이라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79년에는 이화대학 기독교 윤리학과 대학원을 1년 과정을 했어. 조금씩 내가 원하는 걸 찾아서 했지만 완전히 갈증을 해소하지는 못하고, 목만 축였어. 특별히 다른 하고 싶었던 것은 없었어. 집이나 개인 주택이나 아파트가 들어설 때 경제적인 능력이 크지 못해 아쉬웠고, 아빠와 나는 봉사직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자식들 충분한 서포트를 못해 아쉬웠어. 결혼할 때도 잘 해주지 못한 게 아쉽고, 누나가 좋아하는 미술을 전공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뒷바라지 못한 게 미안하고, 그 마음이 아직도 있어."
가장 영향을 준 사람
"젊었을 때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박에스더 선생님이었어. 그건 정말 하나님의 섭리였어. 박에스더 선생님을 만나서 그분의 비서로 있으면서 매년 한국어의 모든 사업을 세계YWCA에 보고를 하는데 그 보고서를 타이핑을 내가 했어. 타이핑을 하면서 YWCA 1년간의 사업을 모두 공부하게 됐어.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가 원하는 부서로 보내주셨어. 그러니까 비서를 붙잡아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부서를 바꿔주시고 거기에 합당한 훈련을 시켜주셨어. 그래서 홍콩에 있는 YWCA 실무자 훈련원 YWCA의 실무자 훈련원에 보내서 6개월 동안 훈련시켜서 논문까지 써서 졸업하고 왔어. 그게 거의 대학원 수준의 훈련이었다고 생각해. 그래서 그게 밑걸음이 돼서 YWCA의 프로그램에 정식으로 간사 노릇을 했어. 대학생 간사를 14년간 했어."
첫월급 4천원
"직장생활의 첫 월급은 4천 원이었어. 그때는 친구들이 초봉이 1만 2천 원에서 만 8천 원까지 받는다는 얘길 들을 때가 있었어. 그런데 나는 원하는 길을 가고 싶어서 봉사단체에 들어가기를 꿈꿨어. 그러니까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 달 나 살기도 궁색해지고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도 되었어. 그래도 외국의 훈련 기회가 주어져서 보상을 많이 받은 것 같아서 감사했어”
대학생 수양회와 전국대회
"대학생들과 함께 수양회를 주최하고 전국대회를 열었을 때가 생생해. 그때 우리가 여러 가지 큰 주제를 다루면서 대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었어.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등산을 하면서 산을 보호하고 심각해진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썼고, 또 한참 그냥 사치가 극에 달해가지고 큰 호텔에서 그냥 결혼식을 얼마나 화려하게 하는지 몇 억씩을 뿌려가면서 결혼식을 하고 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바른 삶을 실천하기 위한 운동과 사회적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어. 또한 학생들과 함께 결의문을 채택하고 노래를 부르며 연대하고 결속하는 일도 했어. 한 번은 경찰서에 불려가는 일도 있었지만, 그것도 결국 잘 해결되었어. 직장 생활에서 이런 순간들이 가장 보람 있었던 것 같아."
브레인 스토밍
"세계화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각국의 실무자들을 훈련시키는 기회도 있었어. 그때 브레인 스토밍이라든지 롤 플레잉이든지 뭐 이런 여러 가지 토의 방법 또 여러 사람의 의견을 이렇게 도출해내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그 세계화를 통해서 많이 배우게 돼가지고 그거를 나도 한국에 와서 많이 써먹었지”
자부심
“우리 손자들아. 내 젊은 시절에는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그리 활발하지 않았어. 그런데 사회운동이라든가, 바른 삶 실천운동, 환경보호운동 같은 세계적인 이슈들에 한국여성도 같이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에 세계 평화를 위해 우리도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단다.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었지."
식모, 파출부, 가사도우미
"그뿐만 아니라, YWCA는 가사도우미를 옛날에 식모라고 불렀던 것에서 변화시켜 직업 여성으로 인식되게 만든 일도 했어. 가사도우미라는 새로운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24시간 그 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출퇴근을 하게 됐지. 이렇게 해서 식모라는 어휘를 완전히 바꿨어. 그리고 돌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에도 YWCA가 앞장섰단다. "
여성 인력의 개발
"YWCA는 여성 인력 개발 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해 정부 지원까지 받았어. 나도 사무총장으로 있으면서 광주, 서울, 부산을 시작으로 여성인력개발원을 20여개를 만들어냈지. 그 후 다른 단체들도 만들기 시작해 전국에 50여 개의 여성인력개발원이 생겼단다.
이런 일들을 통해 나는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어. 우리가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세상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단다. 이야기를 듣고 있니?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어”
할아버지를 만나다
“손자들아, 내가 어떻게 할아버지를 만났는지 궁금하지 않니? 그때 나는 대학생부 간사로 아이들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며 주말마다 캠프도 다녔어. 내 나이가 서른 가까이 될 때쯤, 대학생들이 나한테 장난삼아 "선생님, 처녀귀신 될 거예요. 연애도 안 하고 YWCA 일만 하고 있으니까요" 하며 나를 놀렸지. 그때쯤 결혼도 해야겠다 싶었어.
그러던 중 할머니의 아버지가 장교동 근처에 약국을 하고 계실 때, 너희 할아버지의 형님과 형수님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가게가 있었어. 거기서 어떻게 된 일인지 중매가 들어와서 너희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단다. 중매를 장교동 다방에서 만났는데, 너희 할아버지를 처음 본 순간 낯설지 않고 바로 우리 집안 식구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우리는 그렇게 6개월 동안 만나며 차도 마시고 가끔 식사도 했어. 그때는 데이트 코스도 별로 많지 않았고, 어디를 갔는지는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아. 그러다 연락이 끊기게 되고, 나는 자존심 때문에 먼저 연락하는 것도 싫어서 그냥 그 상태로 3년의 시간이 흘렀어.
그 사이에 할아버지 집안에 힘든 일이 있었고, 나중에 너희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YWCA에 연락을 했다는 거야. 그런데 그때 나는 일본에서 대학생부 간사 훈련을 하고 있었어. 그곳에서 전보가 날아왔는데,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어. 그러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여행 잘 하고 오라는 내용이었지.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지.
너희 할아버지와의 이야기, 재미있었니? 우리의 인연은 정말 특별한 거야.”
집 장만
“할머니가 결혼하고 처음 살던 집에 대해 이야기해줄게. 그때 우리는 석관동, 고려대학교 가는 쪽에 있던 창의동 옆에 있는 조그만 한옥 같은 집에서 살았단다. 그 집은 할아버지의 형수님이 할아버지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마련한 거야. 그래서 시어머니와 아빠와 함께 그 집에서 살기 시작했지. 결혼했을 때 시어머니도 그 집에 계셨고, 그때만 해도 집안일을 도와주는 열다섯, 열여섯 살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어. 시골이나 가난한 집안에서 온 아이들이었지.
할머니는 내가 결혼했을 때 74세셨어. 모두가 할머니 혼자서는 살림을 돌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중학교 갈 때까지, 아니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24시간 머무는 가사도우미가 있었고, 그다음에는 은평교회에서 부탁해 온 권사님이 출퇴근 형식으로 와서 도와주셨단다.우리 집에는 이런 변화가 있었어.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집에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 형태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알 수도 있구나.”
귀한 존재
“할머니가 결혼 생활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너희 아빠, 엄마 같은 아들 딸이 태어났을 때야. 그때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 모든 아이들이 너무 예쁘고 귀해 보였단다. 그 순간부터 생명의 소중함을 진정으로 깨닫게 됐지. 근데 그때 할머니가 바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서, 딸 아들한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해. 그리고 한 번은 대학생부 캠프를 다녀왔는데, 소희가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 그때 너무 가슴이 아팠어.”
장애 아동과 함께 하는 캠프
“자녀들과 함께 행복했던 순간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울 때 그리고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숙제를 해나가는 모습을 볼 때가 기뻤어. 여름 캠프나 방학 동안에는 다른 가정들과 함께 바다 등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지. 그런 경험이 너희들 성장에 큰 기쁨이었단다. 특히 YWCA의 크리스마스 잔치, 장애아동 캠프 같은 행사에 너희를 데리고 갔던 것도,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넓은 경험을 너희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였어. 장애아동과 함께하는 캠프에 너희를 데리고 간 것은, 너희가 장애인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어. 그런 경험이 너희에게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랬지.”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고기야. 너희 엄마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에서는 닭고기를 많이 먹었단다. 시어머니께서 닭살을 발라서 너희들에게 먹여주곤 했어. 그래서 너희도 어렸을 때부터 고기를 잘 먹었지. 생선하고 고기는 항상 우리 식탁에 빠지지 않았어. 할머니도 닭고기와 소고기를 아주 좋아했고, 굴비 같은 거, 꽁치도 좋아해.”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야. 가을에는 풍성한 과일과 단풍이 있어서 매우 좋아했단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가장 의미 있는 선물로는 박에스더 선생님이 크리스마스 때마다 YWCA를 통해 보내주신 조그만 수첩이 있어. 그 수첩은 영어로 된 달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10년 넘도록 매년 보내주셨지. 또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목각 인형도 보내주셨는데, 그걸 지금도 갖고 있어. 크리스마스 트리에 그 목각 인형을 벽에 주룩주룩 매달아 놓고 아직도 즐기고 있단다”
여성이 운전하는 자동차
“옛날에는 여성들이 운전하고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없었어. 그런데 박에스더 선생님은 운전을 하고 다녔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때로는 똥물을 끼얹으며 욕하기도 했데.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어. 처음 YWCA를 시작할 때는 일본식 주택을 사무실로 썼고, YWCA의 45주년 기념으로 명동에 건물을 지었단다. 그 건물 모금을 위해 매년 바자회를 열었는데, '코끼리 복덕방'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로부터 기증받은 물건들로 바자회를 했어. 그런 행사를 참 많이 했던 기억이 나.”
4.19 혁명
“4·19 혁명 때 일도 기억난다. 그때 이기붕 씨 가족이 다 자살하는 일이 발생했어. 이기붕 씨의 부인은 YWCA의 부회장이었거든. 그들 가족이 그런 일을 겪고, 이 사건이 일어나면서 많이 충격을 받았어. 그 당시 사건들이 내게는 정말 엄청난 일이었단다.”
가장 어려운 시기 1
“할머니가 겪었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대한 이야기야. 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은 해에 두 달 차이로 돌아가셨을 때야. 아버지가 폐암 진단을 받고 단 세 달만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소식은 우리 가족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단다. 그 당시엔 암 치료법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어. 우리들은 다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어머니만이 아버지를 돌볼 수 있었지. 병원에서 한 달 동안 계시다가 어머니가 너무 피곤해서 쓰러지셨고, 그 결과 병원 중환자실에서 9일 동안 계시다가 돌아가셨어.
그 후 아버지도 2개월 뒤에 돌아가셨어.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신다고만 아버지에게 말씀드렸고, 진실은 말하지 못했어. 돌아가신 후에는 가족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자주 뵙지 못했던 것에 대해 많이 슬퍼했어. 하늘 아래 부모님이 계실 때와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의 차이를 깊이 느꼈단다.
우리 가족은 유교적인 집안이었지만, 아버지가 우리 가정을 기독교 집안으로 전환하셨어.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세례를 받고 돌아가셨어. 내가 믿는 것은 두 분이 하늘나라에 가셨다는 것이야.”
가장 어려운 시기 2
“대범이가 결혼한 다음 해인 2002년 4월에 할아버지께서 직장암 진단을 받으셨어. 그때부터 시작된 암과의 싸움은 정말 어려운 시간이었지. 일산에 있는 암센터에서 수술을 받으시고, 처음엔 옆구리로 항문 주머니를 달고 퇴원하셨어. 그 주머니를 매일 소독하며 돌보는 일이 내 몫이었어.
6개월 후에는 항문을 복원하는 수술을 받으셨고, 그 이후로는 기저귀를 차야만 했어. 화장실을 하루에도 수십 번 가시는 고생을 하셨지. 그러다가 4년 후, 암이 간으로 전이됐다는 또 다른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어. 간의 70%를 절제하고, 12번의 항암 주사 치료를 받으셨지. 그 주사를 맞고 나면 일주일 동안은 구토증과 식사를 못 하시는 고생을 하셨어.
그 시기는 정말 할아버지 간병사로 지내며 많은 애를 썼어. 그리고 암이 폐로도 전이되어 또 항암 주사를 맞아야 했지.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할머니는 두 고모할머님의 도움으로 힘든 시간을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었어. 고기 같은 영양가 있는 식사를 준비하시며 할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노력했지. 그 시간들은 할머니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단다.”
진관동 합가
“아빠가 언젠가 하늘나라로 가실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하셨지. 그래서 북한산 기슭에서의 삶을 꿈꾸셨어. 그런데 화정에 있는 우리 집이 매매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전세를 주고, 진관동으로 이사를 가게 됐단다. 그곳은 은평 뉴타운이였어. 너희들도 우리와 함께 살자고 제안해 왔고, 그래서 우리 모두 진관동에서 합가를 하게 됐지.
그때 재현이가 겨우 4살이었는데, 얼마나 귀엽게 아침마다 쪼르르 달려와서 우리 방에 들어와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르며 귀여운 재롱을 부렸는지 몰라. 그 소리가 마치 꾀꼬리 같았어. 그때 처음으로 손주의 귀여움에 행복한 웃음과 기쁨을 느꼈단다. 하지만 아빠가 암 센터에 계실 때, 간으로 암이 전이되면서 우울증까지 겪게 되셨어.”
재롱
“당시에 아빠가 암 센터에 계실 때, 정신과 치료도 함께 받기 시작하셨어. 그 치료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단다. 매달 정신과를 방문해서 약을 받아 오지 않으면 불안하고 우울한 증세가 나타나. 그러던 중 진관동에서 우리가 함께 살기 시작했지. 거기서 1년이 지난 후, 아빠는 또다시 폐암 수술을 받으셨어. 그러나 그곳에서 5년 동안 너희와 함께 지내면서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치료받는 시간을 가졌단다.
나중에 재현이 아빠의 직장이 판교로 옮기게 되어서 우리도 판교로 이사를 갔어. 그때 재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지. 그렇게 우리 가족은 여러 시련과 변화를 겪으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단다.”
손자 카드
“내 아이들 키울 때는 직장생활 하면서 늘 바빴어서 아이들이 책을 읽어달라고 할 때도 피곤해서 "내일 읽어줄게" 하며 미룰 때가 많았지. 그런데 손주와의 시간은 그때보다 더 행복했던 것 같아. 손주를 보는 시간에는 여유가 많아서 노년에 손주를 보며 지낸 시간이 젊었을 때 내 자식을 키울 때보다 더 충분히 행복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것 같아.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보면 손주 자랑을 많이 하게 되는 것도 실감하게 되더라. 손주의 재롱을 보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너무 좋아. 정신과 의사도 할아버지가 여러번의 암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손주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손주가 우리에게 주는 행복은 말로 다 할 수 없지. 상훈이와 재현이가 그린 카드들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해서, 그 카드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져.”
감사드리고 칭찬합니다
“2018년에 아버지께 전립선암이 찾아왔어. 다섯 번째 암인데,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수술은 하지 않겠다고 하셔서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만 받으셨지. 28번의 방사선 치료를 하시고, 지금은 거의 완쾌된 상태로, 매년 점검 차원에서 병원을 다니고 있어. 그 결과 아버지는 다섯 번의 암을 이긴 승리자가 되셨어. 아버지도 대단하셨고, 옆에서 도움을 준 가족 간병사도 함께 힘을 냈지. 내가 한 사랑의 수고를 하나님이 보시고 아버지를 치료해 주신 것 같아. 아들, 며느리, 딸, 사위 그리고 손자 재현이, 외손자 상훈이까지 우리 가족 모두가 아버지의 암 치료를 위해 힘을 모았어. 우리 가족 모두가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 많은 교인들이 기도해 주셨어. 교회 식구들과 목사님께도 정말 감사한 마음이야.”
“감사하게도 도움을 준 분들이 참 많아. 김영헌 목사님이 암에 걸렸을 때, 직접 암센터에 찾아와주시기도 했고, YWCA의 박순양 총무님도 암센터 안에서 환자들을 안내하는 봉사를 하셨어. 암 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까지 와 주셨지. 박순양 총무님은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시는 분이시고, 일산 광림교회에서도 기도해 주셨어. 우리 교회 교인들도 많이 기도해 주셨고. 김영헌 목사님께서는 아버지가 장로로 피택될 때 추천해 주시면서, 하나님을 장로님으로 뵙는 게 좋지 않겠냐고 여러 번 권하셨어. 그 덕분에 아버지가 65세 때 장로가 되셨고, 70세에 은퇴하셨지.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많은 분들의 사랑과 기도 덕분에 큰 힘을 얻었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랑이야. 가족 간의 사랑, 친구들 사이의 우정, 약자에 대한 나눔과 섬김이 모두 중요해. 이런 가치들이 나에게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건 내 인생에 큰 축복이었어.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앙, 그리고 청운양로원에서의 경험들이 나를 이끌었지. YWCA에서 일하며 봉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세계 여러 나라 YWCA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 모두 내게는 큰 축복이었어. 그리고 이 신앙을 가족들, 너희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였단다.”
가장 좋아했던 휴가지는
“제일 좋아했던 휴가지는 파리야. 거기 가서 도시 전체가 마치 예술품처럼 느껴졌어. 바르세유 궁전이며, 루브르 박물관 같은 곳들을 혼자 돌아다니며 본 모든 조각과 건축물들이 정말 인상적이었지. 그리고 영국도 특별했어, 오래된 건물들과 고유의 분위기가 있었거든. 지금 새롭게 가보고 싶은 곳은 스페인이나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나라들이야. 이미 로마나 나폴리, 폼페이 같은 곳들은 다녀왔지만, 아직 안 가본 아름다운 곳들이 많아. 크루즈 여행도 해봤는데, 성지 순례나 그리스, 이탈리아를 다녔을 때 정말 좋았어.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여행이야. 건강이 허락한다면, 국내의 아름다운 곳을 여행하거나 크루즈, 일본 같은 가까운 나라들을 탐험하고 싶어. 베트남 같은 곳도 아직 안 가봤으니 가보고 싶고, 북해도도 가보고 싶네. 그리고 나는 신앙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믿음이 굳건하고 참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해.”
기도의 힘
“여기 실버타운에 들어온 후로 작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 교인이 20명쯤 되는 아주 작은 교회인데, 꼭 초대교회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오늘도 누군가가 자기 아들이 공과대학 학장이 됐다며 찰떡을 교회 사람들에게 돌렸지. 그렇게 자기 기쁨을 우리와 나누고 싶었나 봐. 이런 작은 교회 생활이 참 기쁘고, 그분들과의 식사나 연대감도 내 삶을 행복하게 해. 상훈이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때,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했던 것도,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느끼며 지내고 있어.”
믿음의 유산
“신앙을 가지고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다 가고 싶어. 우리 후손들, 아들 며느리 딸 사위, 그리고 재현이, 상훈이 손자들까지 믿음의 유산을 이어가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길 바라. 나도 믿음으로 기도하는 할머니, 어머니로 기억되고 싶어. “
기도하는 사람들
“실버타운에 있는 에벤에셀 교회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목사님이 5명의 교인들에게 기도할 차례를 정해주셨어. 교회에서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두번씩 기도하는 날이 있는데, 그때마다 가족부터 시작해서, 우리 YWCA 동료들, 영문과 친구들, 고등학교 친구들, 그리고 지금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그 중에서도 너희들을 제일 먼저 기도해. 그리고 카톡을 보내거나 가끔 전화를 하는 친구들, 내 폰에 이름이 저장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되더라고. 결국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잘 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거야. 그리고 나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가족들한테 부담이 되지 않게, 평화롭게 하나님의 품으로 가고 싶단다.”
행복이란
"너희가 어렸을 때 그랬었지.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고 결혼하고서는 왜 자꾸 물 떠다 달라면서 일을 많이 시키냐고. 그 때 할아버지가 물어보셨지. 행복이 뭐냐고. 초등학교 2학년 재현이가 스트레스 없이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었어. 그런데, 할머니에겐 스트레스가 아니라 즐거움이었어. "
“손자들아, 내가 여기 실버타운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할머니가 늘 생각하는 건 우리 가족들이야. 내가 이런 이야기들을 너희한테 남기고 싶어. 믿음으로 살면서, 너희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거. 할머니는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인터뷰를 끝내며
"그런데 사실 우리는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못해. 보통 어른들하고 자식들 사이의 대화는 일상적인 안부 묻기가 대부분이잖아. 그래서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이런 소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
할머니는 이 이야기들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 우리 가족들, 특히 너희 손자들에게 남기고 싶었지. 어쩌면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겠지.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것들, 여행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나 만난 사람들 이야기 같은 거 말이야.
나이가 들면서 많은 걸 잊어버리는데, 중요한 순간들은 기록으로 남기는 게 좋겠다 싶더라. 나중에 너희가 커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 믿음과 사랑, 그리고 가족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기억해 줬으면 해.”
사랑과 섬김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조성순 할머니 이야기

지은이 이종경
펴낸이 이대범, 김웅
펴낸곳 RETETO AI 레페토 에이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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